선덕여왕, 대한민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조명하다
Posted 2009/10/23 23:27뒤늦게 <선덕여왕>에 합류했습니다. 명성은 익히 들었는데, 얼마 전부터 따라잡아 보자니 대단히 재미가 있군요. 명성이 괜히 전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다음 편 예고가 나오는 것도 놀랍습니다. 쪽대본 촬영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눈과 머리가 모두 즐겁다
많아야 네 명의 주인공이 나오지만, 그들의 캐릭터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미니시리즈를 연이어 보다가 이렇듯 명확하고도 다양한 캐릭터의 인물들이 현란하게 등장하는 것을 보자니 일단 눈도, 머리도 즐겁습니다. 사방에서 '사랑밖엔 난 몰라'를 끊임없이 외쳐대는 와중에 '야망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보자니 진심으로 신선합니다. (물론 '사랑밖엔 난 몰라' 이야기도 잘 만들면 가슴 뛰고 가슴 시리고 재미있습니다)
<선덕여왕> 43회, 44회에서는 미실의 새로운 도전이 그려졌습니다. 신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으나, 신분과 성의 벽을 넘어서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던 미실이 덕만과 춘추를 통해 왕을 꿈꾸는 단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실과 덕만이 내놓는 수는 그 하나하나가 정확히 오늘의 현실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정말 흥미롭습니다.
선덕여왕, 한국을 말하다: 세금제도
일단 덕만이 내놓은 조세안이 종부세를 의미한다는 건 누구나 눈치챘을 것입니다. 뼈빠지게 일을 해서든, 돈이 돈을 불렸든 어쨌든 사유재산에 대해 왜 차등조세를 하는가, 이것이 종부세 반대론자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심해질수록 사회불안지수가 올라가고 증오범죄(유괴, 묻지마 살인 등)도 따라서 더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죠. 가난한 사람들도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만큼 먹고 입고 자는 것이 보장되고 인간으로서 도덕심을 지킬 만한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부유한 사람들의 위험도는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서둘러 추진했던 정책 중 하나가 종부세를 약화시키는 것이었고, 결국 9억 이상의 집을 가진 사람만 세금을 내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6억 원 이상의 집을 보유한 사람이 종부세를 내도록 했는데, 이렇게 변경된 것입니다. 전세 6천만 원짜리에 사는 저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6억, 9억짜리 집을 살 수 있는 건지 상상도 안 갑니다만, 종부세가 덜 걷힌 만큼 물건에 붙는 세금이나 월급쟁이들이 내야 할 세금이 늘어난단 사실만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드라마에서는 덕만에 대한 반감으로 새로운 조세안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죽방(이문식 씨)이 훈계를 늘어놓습니다. 세제의 혜택을 받을 이들이 도대체 왜 반대하느냐는 것이죠. 오늘날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세금을 내는 이는 적되 그 세금으로 복지혜택을 받는 이는 많은데, 정작 복지혜택을 누릴 이 중에서 종부세를 반대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말이죠.
선덕여왕, 한국을 말하다: 현대사 60년-탄핵, 날치기, 군사 쿠데타
<선덕여왕> 44회의 하이라이트는 탄핵안 의결과 군사를 일으키는 장면입니다. '덕만 탄핵안'을 상정하면서 반대표를 낼 만한 사람은 전날 밤 술에 약을 타서 먹여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도록 술수를 써놓고 같은 편끼리만 모여 화백회의를 개최한 장면, 뒤늦게라도 회의장에 오려는 반대파 두 명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인간 바리케이트를 쳐놓은 장면에서는 한국 현대사의 무수한 장면들이 연상됩니다.
가깝게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떠오르지요. 날치기의 역사는 너무도 오래돼서 새삼 이것저것 언급하는 것조차 입이 아픕니다. 제게 가장 가슴 아픈 날치기로 기억되는 순간 중 하나는 1996년 크리스마스가 막 지난 12월 26일 새벽 6시에 행했던 '노동법 날치기'입니다. 저는 그때 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독재와 폭압정치를 행했던 세력과 손을 잡고 마침내 원하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제 침체를 핑계로 노동법을 개악한 것입니다. 이날 날치기 통과된 법안으로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이는 곧 차별과 생계불안이 온 사회에 만연하게 됨을 뜻합니다.
박정희 3선 개헌도 그렇고, 얼마 전 미디어법도 그렇고, 국민적인 동의를 얻지 못하거나 정당성이 없는 상당수의 법안이 날치기로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우리나라의 자화상이 됩니다. 국민소득이 2만불이라는데, 다른 나라엔 이런 광경이 대체 어떻게 비칠까요.
반대파가 아예 접근도 못하도록 바리케이트를 쳐놓고는, 어찌하든 회의장에 들어가려 하면 난입을 하느라 폭력을 썼다며 기득권층은 '명분'을 쥡니다. 폭력을 유발해놓고는 '신성한 회의장에서 폭력을 썼다'라며 역도로 모는 거죠.
게다가 일부러 기득권층이 테러를 당한 것처럼 꾸며 반대파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이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킬 모든 명분이 성립됩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도 이 정도로 적실하게 한국 현실을 제대로 담진 못하는데, 수천 년 전 신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이 정도로 한국 사회를 반영하다니, 볼수록 놀랍습니다.
* 다만 춘추가 덕만에게 합류하게 된 과정은 아쉽군요. 덕만에게 사람이 모이는 이유가, 덕만의 이상과 그릇이 크기 때문이어야 하는데, '미실만은 안 된다' '미실에게 대적하고 싶다'라는 이유 때문이라니요. 춘추도 이런 이유로 덕만 캠프에 들어옵니다. '골품제는 천한 제도'라는 멋진 선언을 날린 패기 만만한 청년이 갑자기 좀 매력과 힘이 빠진 느낌입니다. 그나저나 이 드라마에서 언제쯤 덕만이 주인공처럼 느껴질지 모르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