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 싶다, 막장 드라마의 기획의도
Posted 2009/03/26 09:30
도대체 넌 의도가 뭐냐?
비록 '드르륵' 열고 닫는 문이 달린 흑백텔레비전이었지만 어쨌든 제가 본 것으로 기억하는 최초의 드라마는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이었습니다. 보다 말다 했어도 아마 이 드라마의 기획의도는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두 형제의 인생 여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본다'쯤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 제가 본 드라마는 수십 편은 족히 되겠지요. 그리고 그중에는 지금까지도 마음과 머릿속에 알싸한 추억이자 그리움으로 남은 것이 있는가 하면(언젠가 그 드라마의 목록들도 한번 풀어놔 보겠습니다), 전혀 기억에 남지 않은 것도 있겠고, 도무지 막장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중도 포기한 드라마도 숱하게 있습니다.
언제나 '막장 그라운드'였던 아침 드라마 <하얀 거짓말>에서는 옛 연인끼리 한 집안에서 만난 데다, 남자의 과거를 눈치 챈 아내의 복수가 시작되었으며, '하이틴 막장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는 납치, 왕따, 폭력, 재벌, 삼각관계에 이어 기억상실증과 불치병이 등장했습니다.
여기에 '막장'의 대명사 격인 <아내의 유혹>에서는 차츰 막장화되고 있는 다른 드라마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죽은 것으로 나왔던 진짜 민소희가 살아 돌아와서는 드라마가 방송되는 내내 악을 질러 댐으로써 '막장 오브 막장'임을 과시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겁니다. 80년대부터 제가 보았든 못 보았든 수백 편은 될 드라마들, 예전에는 기획의도를 보면 90% 이상이 '~를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를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였는데 막장이 범람하는 요즘 드라마들은 기획의도가 대체 무엇이냐, 이거죠.
드라마는 여전히 진정한 삶과 사랑과 가족을 찾아 헤매는 중
드라마의 의도는 각각의 홈페이지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이중 '막장' 소리를 지속적으로 들었거나 현재도 듣고 있는 <꽃보다 남자> <하얀 거짓말> <에덴의 동쪽> <사랑해, 울지 마> <미워도 다시 한번> <아내의 유혹>의 기획의도를 읽어 보았습니다.
<하얀 거짓말>
| 이 드라마에선 세 명의 여자가 결혼이라는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 나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결혼을 선택한 여자. 오점 없는 인생을 위해 사랑보다는 조건을 선택한 여자. 데인 상처를 치료 받기 위해 불구덩이를 선택한 여자. (중략) 달라진 현대 사회상과 가족관에 맞춰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각기 다른 가족상으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
<에덴의 동쪽>
| 엇갈린 운명으로 두 번의 인생을 거듭 살아내야만 하는 두 가문의 '파란의 가족사'를 통하여 진정한 사랑과 영혼의 구원이 휴머니즘의 회복임을 해부해 전달해 보이고자 한다. |
<미워도 다시 한번>
| 이 드라마는 결혼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중략) 여기 오십대지만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중년 여자의 피맺힌 복수와 뼈아픈 외로움이 있습니다. 모두가 사랑과 결혼의 부작용인 거지요. 피 끓는 사연... 그 사랑을 위해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
<사랑해, 울지 마>
| 아픈 상처를 사랑으로... 용서로... 이해로 치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묻는 드라마. |
역시나 '진정한 사랑'과 '가족'의 의미를 찾기 위해 드라마는 오늘도 뛰고 있었군요. 그렇다면 '하이틴 막장 드라마' <꽃보다 남자>는 어떨까요?
<꽃보다 남자>
| 언제나 젊음이고 싶은 이들을 위한 하이 판타지 로망스. 드라마란 장르가 현대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최상의 판타지를 보여 준다. |
죽은 줄 알았더니 '악 쓰기 신공'을 연마하고 다시 나타난 진짜 민소희 덕분에 막장계를 단번에 평정한 <아내의 유혹>의 기획의도는 이랬습니다.
|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고 선택한 결혼에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여자 (중략) 자신을 철저하게 모욕한 남편과 내연녀(친구)를 지독하게 복수하고 새로운 인생과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
아하! <아내의 유혹>도 '새로운 인생과 사랑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리려고 만들었군요. 그나마 <꽃보다 남자>는 새롭다고 해야 할까요? 인생의 의미고 진정한 사랑이고 집어치우고 '최상의 판타지를 보여 주'는 것이 기획의도였군요. 그나마 다른 드라마와 비교하면 솔직한 편이라 하겠습니다.
진정한 삶과 사랑과 가족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출생의 비밀이 필요하고 사람을 납치하고 삼각, 사각관계가 등장하고 혼전 임신을 하고 그렇게 바람이 났던 것이었다니. 한송이 국화를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도 울었겠죠.
무엇이 막장과 명작을 가르는가?
일주일에 열 편도 넘는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으니, 웬만한 대한민국 국민은 진정한 삶과 사랑과 가족의 의미를 이미 발견하고도 남았어야 하겠군요. 하지만 기획의도는 홈페이지에만 남겨 놓고 실제로는 자극적인 요소만 잔뜩 발라놓은 조미료 같은 드라마에서는 어떤 '진정성'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비슷한 기획의도를 갖고도, 심지어 비슷한 소재를 갖고도 방영이 끝난 한참 후에도 회자되는 드라마들이 많습니다. 엄태웅의 <부활>, 주지훈, 엄태웅의 <마왕>은 죽은 줄 알았던 이가 다른 신분으로 나타나 복수극을 펼친다는 점에서 <아내의 유혹>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이지만 하나는 명작이 되었고 하나는 막장이 되었습니다. 소지섭, 임수정의 <미안하다, 사랑한다> 역시 자기의 신분을 감추고 복수극을 펼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요.
과연 어떤 요소가 좋은 드라마와 막장 드라마를 가르는 것일까요? 쓰는 드라마마다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에도 불치병, 삼각관계, 신분상승을 향한 욕구, 재벌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막장 드라마와 소재만 보면 비슷한 것이지요.
결국 '무엇을 다루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루는가'가 문제가 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보게 된다면 막장, 드라마 속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 하나하나의 삶을 보며 공감하고 그것을 통해 내 삶까지 돌아보게 된다면 명작이 되는 게 아닐까요?
기획의도는 같더라도 명작 드라마는 그것을 보면서 삶의 다양한 측면을 되새기고 배우게 되며, 등장인물들의 변화와 성장, 성숙을 통해 보는 이까지도 함께 성장하게 되지요. 위에 언급한 <부활>의 강혁(서하은이자 유신혁인), <마왕>의 승하와 오수, <미사>의 무혁과 은채... 이름만 들어도 그들의 삶이, 그들의 행동과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뿐만이 아니라 종영된 뒤 한참 흘렀어도 여전히 내 가슴속, 머릿속 한켠에서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명작 드라마는 함께 울고 웃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진정한 삶과 사랑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줍니다.
기획의도는 그럴 듯하게 포장해 놓고 실제로는 '시청률과 광고 수익의 진정한 의미'만 따지는 막장 드라마, 그러라고 준 전파가 아닐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