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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200억을 들여 만들었다는 대작 드라마 <아이리스>에게 시청률로는 밀리지만 <미남이시네요>는 올해 드라마 중 가장 뽀송뽀송하고 유쾌한 드라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내조의 여왕> 정도가 완성도 높고 유쾌하고 빵빵 터지는 드라마였지만, 일단 배경이 힘겨운 노동과 자리 싸움의 현장인 회사였고 주인공들도 삼십대였지요. 그런데 <미남이시네요>는 아이돌 밴드가 등장하는 만큼 배경과 주인공 나이대가 달라서 상큼상큼상큼합니다(어쨌든 저도 <내조의 여왕> 왕 팬입니다!).  

드라마 시작 전엔 아이돌 밴드에 남장여자가 들어간다는 이야기라기에 '빤하구먼~! 쯧쯧' 하고 생각했습니다. 강마에가 오케스트라 단원을 '똥 덩 어 리'라 부를 때의 표정으로 방송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드라마가 얼마나 재미있겠어. 아이돌 가수 좋아하는 아이들에겐 먹히겠네.' 하고요. 그런데 <아이리스>보다 한 주 먼저 시작했기에 일단 한번 볼까 하는 심정으로 첫 방송을 보자마자 바로 '낚였'습니다. 아니 뭐 이런 신선하고 재미있는 드라마가 다 있나 하면서요. 


기분 좋은 배신감이 느껴지는 드라마

이 드라마가 좋고 재미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빤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아이돌 그룹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남장여자 이야기'가 빤하지 않다니 놀랍죠? 어차피 드라마들은 1, 2회만 보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세 가지 시나리오가 그려집니다.  이 드라마도 대충 어떤 방향으로 갈지 보이죠.

여기에서 '빤하지 않다'는 건 상황들이 신선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4회 마지막 수영장 장면을 볼까요? 고미남이 물 속에서 오래 버티느라 기진맥진해 있었고 황태경이 구하러 들어왔습니다. 여기까진 드라마에서 수천 번 나왔던 장면입니다. 시청자는 예상하죠. '아, 또 남자가 물에 빠진 여자를 구해주는 스토리네. 이러다 인공호흡이다 뭐다 하면서 뽀뽀도 할 수 있겠군.'

그런데 5회 첫 장면에서는 전혀 다르게 전개가 되었습니다. 황태경의 인기척으로 고미남이 정신이 번쩍 들더니, 황태경의 머리를 박차고 스스로 밖으로 나간 거지요. 오히려 황태경은 고미남의 하이킥에 맞아서 기절했고요. 

이런 식으로 <미남이시네요>는 순간순간 '배신감'이 느껴집니다. 홍 자매 드라마는 처음 보는데, 이런 '배신감 주는 장면'에서 그들의 내공이 느껴집니다. 다음 회에서는 또 어떤 배신감을 느낄지 기대도 되고요.

좋은 대본과 재능 있는 연기자가 만났을 때

스토리 전개와 대사들도 착착 감기는데, 만약 연기가 안 되었다면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만약 장근석-박신혜 씨가 아니었다면 드라마가 이 정도로 설득력을 얻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습니다. 좋은 대본과 좋은 연기자가 만나 상승작용을 일으켰다고 할까요. 

장근석 씨는 그동안 '허세' 이미지 때문에 재능이 과소평가되는 배우였습니다. 일단 그는 상당히 노력하는 배우고, 욕심이 많은 배우이기도 합니다. 신비주의니 뭐니 해서 광고만 줄창 찍어대는 게 아니라 정말 꾸준히 작품활동을 합니다. 비슷비슷한 역할이 아닌, 다양한 캐릭터를 애써 찾아서 연기하는 중이죠.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장근석 씨는 이례적일 정도로 열심히 하는 꾸준한 배우입니다. 노래도 잘하고, 스타일링에 대해서도 감탄이 나옵니다. 그는 상당히 독특한 스타일도 잘 소화하는 얼굴과 몸을 가졌습니다. 본인이 그런 것에 도전하는 걸 즐기기도 하고요. 

박신혜 씨는 그동안 나이와 이미지에 잘 맞는 작품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드디어 이 드라마를 만났습니다. 고미남 캐릭터가 이만큼 순수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건 박신혜 씨의 연기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노래도 잘하죠. 고미남으로 남장 했을 때 좀 더 굵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게 아쉬운데, 그럼에도 그냥 다 이해가 될 정도로 순수한 매력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습니다.

'짝사랑남'을 맡고 있는 정용화 씨나 실제 아이돌 그룹 가수인 이홍기 씨도 본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습니다. 배우들 연기 때문에 속 썩을 일이 없다니, 이십대 초반 배우가 주인공인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이기도 하지요.

작가님, 이것만은 제발!

그래도 걱정되는 게 없는 건 아닙니다. 구리구리한 출생의 비밀 코드는 제발 좀 없길 바라는데, 역시나 이 드라마도 그 장치를 사용하는군요. 홍 자매 극본답게 그 부분도 무리가 덜 가게 다루어주길 간절히 간절히 빌어봅니다.

또 하나, 언제나 도움을 받기만 하는 여자들. 고미남이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민폐 캐릭터였다지만, 6회에서는 유헤이마저 도움 받는 여성 캐릭터에 합류했습니다. 그동안 유헤이 캐릭터는 '가식적인 국민요정'으로서 황태경과 티격태격하는 싸움도 할 수 있는 당찬 캐릭터였는데, 황태경에게 극적인 도움을 한 번 받더니만 딱 반하고 말더랍니다. 쩝. 

 

* 참, 강신우 캐릭터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겠네요. 아시아 최고의 아이돌 그룹 세 멤버가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하는 설정, 이건 드라마니깐 괜찮습니다. 어차피 현실성에 목숨 거는 드라마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강신우가 고미남을 좋아하게 된 과정은 너무 허술하게 처리되었고, 고미남을 좋아하는 현재도 너무 소극적입니다. 이 캐릭터가 가장 설득력이 덜하단 뜻입니다. 황태경-고미남의 감정선은 세심하게 처리되어 잘 이해가 되는 반면, 강신우의 감정은 그저 고미남을 좋아한다는 것밖에 모르겠거든요. 작가님, 제발!!

뒤늦게 <선덕여왕>에 합류했습니다. 명성은 익히 들었는데, 얼마 전부터 따라잡아 보자니 대단히 재미가 있군요. 명성이 괜히 전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다음 편 예고가 나오는 것도 놀랍습니다. 쪽대본 촬영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눈과 머리가 모두 즐겁다

많아야 네 명의 주인공이 나오지만, 그들의 캐릭터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미니시리즈를 연이어 보다가 이렇듯 명확하고도 다양한 캐릭터의 인물들이 현란하게 등장하는 것을 보자니 일단 눈도, 머리도 즐겁습니다. 사방에서 '사랑밖엔 난 몰라'를 끊임없이 외쳐대는 와중에 '야망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보자니 진심으로 신선합니다. (물론 '사랑밖엔 난 몰라' 이야기도 잘 만들면 가슴 뛰고 가슴 시리고 재미있습니다)

<선덕여왕> 43회, 44회에서는 미실의 새로운 도전이 그려졌습니다. 신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으나, 신분과 성의 벽을 넘어서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던 미실이 덕만과 춘추를 통해 왕을 꿈꾸는 단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실과 덕만이 내놓는 수는 그 하나하나가 정확히 오늘의 현실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정말 흥미롭습니다. 

선덕여왕, 한국을 말하다: 세금제도

일단 덕만이 내놓은 조세안이 종부세를 의미한다는 건 누구나 눈치챘을 것입니다. 뼈빠지게 일을 해서든, 돈이 돈을 불렸든 어쨌든 사유재산에 대해 왜 차등조세를 하는가, 이것이 종부세 반대론자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심해질수록 사회불안지수가 올라가고 증오범죄(유괴, 묻지마 살인 등)도 따라서 더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죠. 가난한 사람들도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만큼 먹고 입고 자는 것이 보장되고 인간으로서 도덕심을 지킬 만한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부유한 사람들의 위험도는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서둘러 추진했던 정책 중 하나가 종부세를 약화시키는 것이었고, 결국 9억 이상의 집을 가진 사람만 세금을 내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6억 원 이상의 집을 보유한 사람이 종부세를 내도록 했는데, 이렇게 변경된 것입니다. 전세 6천만 원짜리에 사는 저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6억, 9억짜리 집을 살 수 있는 건지 상상도 안 갑니다만, 종부세가 덜 걷힌 만큼 물건에 붙는 세금이나 월급쟁이들이 내야 할 세금이 늘어난단 사실만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드라마에서는 덕만에 대한 반감으로 새로운 조세안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죽방(이문식 씨)이 훈계를 늘어놓습니다. 세제의 혜택을 받을 이들이 도대체 왜 반대하느냐는 것이죠. 오늘날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세금을 내는 이는 적되 그 세금으로 복지혜택을 받는 이는 많은데, 정작 복지혜택을 누릴 이 중에서 종부세를 반대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말이죠. 

선덕여왕, 한국을 말하다: 현대사 60년-탄핵, 날치기, 군사 쿠데타 

<선덕여왕> 44회의 하이라이트는 탄핵안 의결과 군사를 일으키는 장면입니다. '덕만 탄핵안'을 상정하면서 반대표를 낼 만한 사람은 전날 밤 술에 약을 타서 먹여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도록 술수를 써놓고 같은 편끼리만 모여 화백회의를 개최한 장면, 뒤늦게라도 회의장에 오려는 반대파 두 명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인간 바리케이트를 쳐놓은 장면에서는 한국 현대사의 무수한 장면들이 연상됩니다.

가깝게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떠오르지요. 날치기의 역사는 너무도 오래돼서 새삼 이것저것 언급하는 것조차 입이 아픕니다. 제게 가장 가슴 아픈 날치기로 기억되는 순간 중 하나는 1996년 크리스마스가 막 지난 12월 26일 새벽 6시에 행했던 '노동법 날치기'입니다. 저는 그때 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독재와 폭압정치를 행했던 세력과 손을 잡고 마침내 원하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제 침체를 핑계로 노동법을 개악한 것입니다. 이날 날치기 통과된 법안으로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이는 곧 차별과 생계불안이 온 사회에 만연하게 됨을 뜻합니다. 

박정희 3선 개헌도 그렇고, 얼마 전 미디어법도 그렇고, 국민적인 동의를 얻지 못하거나 정당성이 없는 상당수의 법안이 날치기로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우리나라의 자화상이 됩니다. 국민소득이 2만불이라는데, 다른 나라엔 이런 광경이 대체 어떻게 비칠까요. 

반대파가 아예 접근도 못하도록 바리케이트를 쳐놓고는, 어찌하든 회의장에 들어가려 하면 난입을 하느라 폭력을 썼다며 기득권층은 '명분'을 쥡니다. 폭력을 유발해놓고는 '신성한 회의장에서 폭력을 썼다'라며 역도로 모는 거죠.

게다가 일부러 기득권층이 테러를 당한 것처럼 꾸며 반대파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이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킬 모든 명분이 성립됩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도 이 정도로 적실하게 한국 현실을 제대로 담진 못하는데, 수천 년 전 신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이 정도로 한국 사회를 반영하다니, 볼수록 놀랍습니다.

* 다만 춘추가 덕만에게 합류하게 된 과정은 아쉽군요. 덕만에게 사람이 모이는 이유가, 덕만의 이상과 그릇이 크기 때문이어야 하는데, '미실만은 안 된다' '미실에게 대적하고 싶다'라는 이유 때문이라니요. 춘추도 이런 이유로 덕만 캠프에 들어옵니다. '골품제는 천한 제도'라는 멋진 선언을 날린 패기 만만한 청년이 갑자기 좀 매력과 힘이 빠진 느낌입니다. 그나저나 이 드라마에서 언제쯤 덕만이 주인공처럼 느껴질지 모르겠군요.


<슈퍼스타K>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케이블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시청률 행진을 계속하고 있으니 말이죠. 비록 문자 투표 수는 8만 건 정도지만, 어쨌든 온-오프라인에서 이토록 화제가 되는 것을 보면 이 프로그램은 제작진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슈퍼스타K>가 정말 성공하느냐 하는 것은 2시즌이 방송되는 것으로 판가름납니다. 예전 <악동클럽>도 그룹을 결성하여 앨범을 발표했지만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고, '악동클럽' 2기도 탄생했지만 그때는 시청률도 별로였고, 2기 멤버들도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게 사람들에게서 잊혔지요. 이번 <슈퍼스타K>는 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슈퍼스타K>가 성공해야 하는 이유

누구나 알다시피 <슈퍼스타K>는 <아메리칸 아이돌>을 모방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블로그에 <아메리칸 아이돌> 카테고리가 따로 있을 정도로 그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그대로 따온 <슈퍼스타K>도 굳이 찾아서 볼 만큼 주목하고 있습니다이제 시청자 투표로 탈락자가 결정되는(여전히 심사위원 점수가 반영되긴 하지만) 본선 무대가 3주째 진행되었고, 이 프로그램을 한 번 더 솔직하게 곱씹고 싶습니다.

여러 단점과 결함이 있더라도 저는 <슈퍼스타K>가 잘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한국 가요계의 왜곡이 너무도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기획사가 나이 어린 지원자들을 모아 '다듬어서' 만들어내놓는 시스템이 야기한 비슷비슷한 후크송과 걸 그룹/보이 그룹, 넘쳐나는 표절시비로 가요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 애프터스쿨을 인터뷰했을 때 그룹의 막내인 유이 씨가 자신은 고등학생 때 기획사를 찾아갔다며 '너무 늦게 시작해서 힘들었어요'라고 말하더군요.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해야 적절한 걸까요? 그만큼 연예기획사는 나이 어린 아이들을 오디션해서 키운다는 뜻이겠죠)

노래로 승부할 수 있는 가수도 성형수술을 받고 노출화보를 찍고 가십토크 프로그램에 나와 연예인 누구와 사귀었네, 하는 폭로성 이야기나 해야 겨우 반짝 주목이라도 받지요. 음악으로 승부하고 음악으로 사랑받는 가수는 점점 드물어집니다. 이런 환경에서 <슈퍼스타K>는 '기획사 물'이 들지 않은, 신선하고 새로우면서도 실력이 있는 가수를 발굴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메리칸 아이돌>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실제로 미국에서는 <아메리칸 아이돌>이 방송되면서 팝계가 다시 살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팝계가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시작한 <아메리칸 아이돌>은 여러 순기능을 가져왔습니다. 일단 다양한 노래를 소개했습니다. 지역 오디션부터 할리우드 본선 오디션, 세미 파이널, 파이널을 거치는 동안 참가자는 수많은 팝을 부르며 때로는 향수를 자극하고, 때로는 새로운 좋은 노래를 소개했습니다.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불리는 노래는 매주 아이튠 다운로드 순위에서 급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죠.

 

다양한 장르의 유명 가수(머라이어 캐리, 제니퍼 로페즈, 스티비 원더, 배리 매닐로, 도나 서머, 아바 등)나 프로듀서와 작곡가(데이비드 포스터, 앤드루 로이드 웨버 등)의 멘토링으로 실력이 성장해가는 참가자를 보는 재미도 무척 큽니다. 물론 기획사에서 트레이닝 받지 않아 '빤하지' 않으면서도 실력 있는 가수의 탄생은 <아메리칸 아이돌> 최대의 수확이겠죠.

켈리 클락슨, 캐리 언더우드, 크리스 도트리, 제니퍼 허드슨 같은 대형스타도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면 여전히 자기 사는 동네에서 그냥 취미로 노래 부르고 있었을 거예요. 시청자들은 직접 투표를 하면서 이런 스타를 자기가 직접 발굴해낸다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거고요.


성공하고 싶다면 제대로 벤치마킹하라

 

<슈퍼스타K>도 이런 역할을 수행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일단 이번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개인사를 통해 '감동'을 쥐어짜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메리칸 아이돌>은 할리우드 오디션부터는 더 이상 개인사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할리우드 본선 오디션 때에는 참가자의 갈등과 우정, 치열한 노래연습과 대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탑36 또는 탑24가 모여 치르는 세미 파이널 때에는 노래 부르기에 앞서 30초~1분 정도 간단한 멘트가 나옵니다. 자기만의 습관, 처음 노래 부른 기억 등에 대해 말하면서 시청자에게 자신을 친근하게 어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슈퍼스타K>는 본선 3라운드가 진행되도록 지역 오디션 때부터 나왔던 개인사가 아직도 반복 세뇌될 정도로 나옵니다. 이미 다 아는 얘기라 지겨워질 정도입니다. 또한 도전자가 노래하기 전에 계속 눈물 흘리는 모습만 보다 보니 공연에 앞서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 역효과를 내고 있고요.

<아메리칸 아이돌> 세미 파이널부터는 치열한 경쟁이나 개인사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습니다. 본인이 부를 노래를 과제에 따라서 스스로 고르고, 멘토와 만나 노래 연습을 하면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현재 <슈퍼스타K>에서 가장 부족한 점이 이것입니다. 도전자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는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들이 어떤 경향을 가졌는지, 어떤 매력이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어필해야 합니다.

현재는 한 주에 두 명씩 떨어지기 때문에 파이널 무대가 겨우 다섯 번 진행될 뿐이라 그 과정에서 그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공감하며 응원할 만한 분위기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있습니다. 무대 안에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어려운 구조이므로, 노래 부르기 전 30분 동안 나오는 영상에서라도 그걸 표현해내야 합니다. 기획사 사람들을 데려다놓고 계약금을 제시하며 도전자를 시험에 들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매력과 성장에 집중해야 시청자가 도전자를 기꺼이 응원하고 가수의 꿈을 이루는 데에 자신이 미약하나마 동참했다는 보람이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메리칸 아이돌> 무대를 보면서 1분(길어야 2분) 정도로 짧게 편곡된 노래를 들으면서도 울컥할 때가 있습니다. 단지 완성도 있는 공연 때문이 아니라 그 한 노래에 도전자의 꿈과 열정, 노력, 삶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기 때문입니다.

제작진은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감동적인 건 더 이상 그들의 사연이 아닙니다. 도전자의 노래가 시청자에게 가장 큰 감동이 된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사연보다 노래가 더 드라마틱할 수 있습니다. 노래와 그들의 성장담으로 사로잡아야 시즌2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사족 한마디: 우승자에게 데뷔할 기회를 준다면서, 혹시 기획사에서 또 한 명의 아이돌로 만들어놓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아메리칸 아이돌>의 스타들은 기획사에서 '다듬는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음악세계와 외모를 격하게 변형시키지 않고 취향을 존중해주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드라마는 결코 웰메이드가 아닙니다. 한 회 안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 남발되곤 하니까요. 승마에 사격에 검도도 하는 우리 아가씨가 딱 자전거만 못 탄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죠. 이태윤 변호사는 분명히 자기가 자전거 타고 데이트하자고 말해 놓고는 강혜나가 자전거를 서툴게나마 타는 걸 보면서 '생각보단 잘 타네' 하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모순을 지적하자면 한둘이 아니죠.

그런데 지난주 제가 '유레카'라고 외칠 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환갑을 넘기신 저희 엄마와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제 여동생에게 이 드라마가 어떻느냐고 했더니 '너무 재미있다. 유쾌하다. 가슴 설렌다.' 같은 열광적인 반응이 돌아온 것입니다.

세대를 뛰어넘어 <아가씨를 부탁해>가 호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저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모든 드라마가 웰메이드가 될 필요는 없으며, 드라마의 기획의도가 시청자에게 어필된다면 그 또한 뭔가 가치가 있는 게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든 거죠.

이 드라마, 슬슬 입질이 온다

마침 지난주, 7-8회부터는 <아가씨를 부탁해>가 조금 재미있어졌습니다. 집사 서동찬이 본격적으로 아가씨 강혜나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아가씨 강혜나는 본격적으로 변호사 이태윤과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여의주도 본격적으로 서동찬을 좋아하기 시작했고요.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인 '러브 라인'이 제대로 형성되어 사건이 흘러가게 된 거죠.

'이게 말이 돼?' 하는 꼰대스러운 눈을 감고 드라마를 보면서 저는 2006년 <경성 스캔들> 이후 처음으로 다음 편을 기다리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경성 스캔들> 초반부의 전개는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재치 있었습니다. 9회부터는 산으로 가고 말았지만.) 9회를 기다리면서 마음도 설레고, 기대도 되더군요.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일을 접고 텔레비전을 찾아서 보았습니다.

윤상현의, 윤상현에 의한, 윤상현을 위한 드라마

그 설렘의 한가운데에는 전직 제비이자 현직 집사인 서동찬 역의 윤상현 씨가 있었습니다. 저는 6회까지만 해도 윤상현 씨를 보면서 윤은혜 씨와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 보여서 아쉽다고 느꼈습니다. 껄렁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남자 주인공으로 강지환 씨가 어떨까 하면서 대입해 보곤 했죠. 하이톤의 목소리를 낼 때가 많은데, 강지환 씨도 연기할 때 하이톤을 많이 사용하니까요. (어쩌면 <경성 스캔들>의 영향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7회 자전거 장면에서 강지환 씨를 완전히 떨쳤습니다. 아가씨를 좋아하지만 이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스라히 강혜나를 바라보는데, 그 연기는 다른 사람으로 결코 대체될 수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9회에서도 강혜나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킨 뒤의 복잡한 심경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과연 쪽대본에서 나올 수 있는 퀄리티의 연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본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데(대사로 미루어볼 때) 그걸 소화해서 완전히 서동찬 자신이 되어 있는 윤상현 씨의 집중력은 참 놀라웠습니다.

<아가씨를 부탁해>가 시작할 때에는 윤은혜 씨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어느덧 서동찬이 극의 독보적인 주인공처럼 느껴집니다. 혼자서 극의 모든 감정적 흐름, 사건의 흐름을 이끌어가고 컨트롤하는 듯 보이더군요. 저는 <내조의 여왕>을 못 보았는데, 윤상현 씨 연기 때문에 그걸 보고 싶어질 만큼 인상적입니다. 좋은 연기자가 쪽대본이라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이렇게 좋은 연기를 보여주니 참 고마울 따름입니다.

나도 집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이 서동찬 역의 윤상현 씨라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여자 주인공에게 아무도 반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지금껏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여자 주인공에게 말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일단 강혜나의 '신분' 때문인지 이태윤 변호사도 사귀는 사이임에도 존댓말을 씁니다. 아, 참으로 흐뭇한 광경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 심지어 광고에서는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을,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니까요. (싸울 때도 아내들은 '우리, 이혼해요!'라고 존댓말을 쓰죠) 

<아가씨를 부탁해>의 '집사 코드'는 여성을 상당히 자극하는 면이 있습니다. 말은 집사지만 사실상 하인이나 다름없는데, 그는 내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줍니다. 내가 아무리 싸가지 없이 굴어도 내게 깍듯하게 대하며, 항상 옆에서 나를 보호해주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서 뭘 해도 안심이 됩니다. 남성이 순종적인 여성에 대한 판타지가 있듯이, 여성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여성의 이상형은 '평생 나만 사랑하고 바라봐줄 남자'입니다. (뭐, 워낙 이래저래 각박해진 요즘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평생 나만 사랑해줄 남자를 찾지 않는 건 아니지요) 그런데 서동찬 '집사'는 직업부터 평생 곁에서 바라봐줄 남자인 데다 키 크고 잘생겼고 한 발 더 나아가 여자를 사랑해주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강단 있던 아가씨는 어딜 가고, 서동찬 집사가 아니면 회의 하나 제대로 참석 못하는 무능한 여자만 남았느냐, 이런 비판은 잠시 접어두겠습니다. 그런 드라마가 한둘이 아니어서 말이죠. 휴우! 팍팍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도 집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반쯤은 성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게 말이 돼?' 하다가 '나도 집사가 있었으면!'까지 오게 만든 윤상현 씨의 연기는 참 대단합니다.)

이제 과거는 밝혀졌고 갈등도 점점 고조되겠군요. 절반이 진행되도록 여전히 강혜나와 이태윤 캐릭터가 약하다는 점은 마음에 걸리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서동찬 캐릭터의 매력에 집중해서 보면 드라마가 꽤 재미있습니다. 서동찬의 카운터파트인 이태윤 캐릭터가 너무 약해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이 어서 보완되었으면 합니다만, 팍팍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설레고 유쾌한 로맨스에 빠지게 해 주는 이 드라마, 저는 한 표 던지겠습니다.
 

<스타일>을 이끌어가는 건 결국 두 가지였습니다. 타인의 호의를 자기에 대한 관심으로 착각하는 도끼병 걸린 두 여자와 돈 많고 나이든 '회장님'의 여성편력. 참, 여기에 사각관계를 포함시켜야겠군요.

이 드라마는 전문직 드라마임을 표방하면서도 잡지사라는 곳을 아주 하찮은 곳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평생 잡지나 패션엔 전혀 관심도 없던 이를 발행인으로 앉힌다는 말인데, 이것 참!

하다못해 요즘은 재벌3세도 사원-대리-부장 등의 자리는 거칩니다. 물론 그 뒤에 초고속 승진을 하여 삼십대 초중반에 상무니 전무니 이런 직급을 맡았다가 경영자의 자리에 오르지만요.

저도 잡지사에 있어봤지만(<스타일>에 나오는 잡지와는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발행인의 역할은 아주 중요합니다. 취재하고 글쓰는 이들을 얼마나 잘 이해해주느냐, 잡지업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은가, 실무에 파묻힌 기자가 못 보는 것을 얼마나 잘 짚어내느냐, 이런 것은 매우 중요하죠.

겉으로는 방목하는 듯 보이지만 방향을 설정하고 전체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제가 다닌 잡지사의 발행인께서 하셨던 역할이고, 저는 그분에게서 '선배'에겐 배우기 힘든 또 다른 것들을 많이 배웠습니다. (물론 운이 좋아서 이렇게 좋은 발행인을 만난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드라마는 적어도 전문직 드라마라는 타이틀은 포기해야겠군요. 그저 혈통주의에 이끌려 낙하산을 타는 젊은이의 얘기일 뿐이에요.

또 하나. 도끼병 걸린 두 여자 말이에요. 왜 여자를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할까요? 수영장에서 구해줬다고 관심 있는 줄 알다니. 그럼 물에 빠진 사람을 모른 척해야 하나요. 이서정(이지아)과 박기자(김혜수)가 구두 하나로 참 오랫동안 감정 싸움을 하더군요.

그러다 갑자기 서우진(류시원)과 박기자의 관계가 진전되었던데, 제가 촌스러운 건지 그들이 왜 저렇게 발전했는지를 당최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서로 비꼬기만 하던 이들이 왜 갑자기 연인 비슷하게 되었는지 말이죠.

보통 사이 안 좋은 남녀 주인공이 등장하면 '아, 둘이 맺어지겠군' 하는 것쯤은 누구나 예상합니다. 중요한 건 과정이죠. 둘이 정 들고 상대에 대해 미처 알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한 뒤에야 호감을 갖는 것이 정석이죠.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도대체 언제 어떻게 감정이 싹텄는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게다가 무슨 비싼 가방을 두고 베스트드레서 경쟁을 하는 이서정과 박기자라니. 여자는 그렇게 하찮은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옷 잘 입는 것, 좋은 가방, 물론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도 일로, 실력으로 경쟁하고 싶다고요.

이서정은 도대체 왜 그렇게 일은 안 하고 실수만 하는지, 게다가 실수했을 때 그걸 만회하려는 노력조차 안 하고 그저 변명만 늘어놓는지, 이 드라마는 잡지도 여성도 지나치게 왜곡하고 있어서 답답합니다.

결국 <스타일>은 출생의 비밀과 유산 문제, 사각관계, 남자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인생을 꽃 피우는 캔디로 이루어진 진부한 드라마를 벗어나지 못하는군요.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에는 흔히 말하는 막장 코드(불륜, 복수, 배신, 무조건 악역 등)가 없다. 자연히 부담을 덜어놓고 욕을 안 하면서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막장코드 대신 '결혼은 꼭 해야만 하는 것', 심지어 '아이는 꼭 낳아야 하는 것'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결국 이 드라마는 결혼과 출산에 관한 캠페인처럼 끝나고 말았다.


시작은 나름대로 신선했다. 일본 드라마를 들여온 것이라 지진희 씨의 연기가 일본 배우와 비교가 되기도 했지만, 몇 회 지나며 지진희 씨만의 표정 연기와 몸짓 연기가 몸에 배기 시작하면서 재미있는 캐릭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도 우리 드라마에서 '결혼 하는 남자'는 꾸준히 다뤄왔다. 그들은 대부분 바람둥이, 나쁜 남자였다. 결혼하면 여자를 더 많이 만날 수 없기 때문에 결혼을 피하는 것이다. 이외엔 결혼하기가 굳이 굳이 굳이 싫다는 캐릭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재희 캐릭터는 이런 빤함에서 벗어나 있었다.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는 단점은 있으나, 여자를 자유롭게 만나고 싶은 '이기적인' 이유로 결혼을 하기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삶의 질을 위해, 결혼하면 너무도 달라질 자신의 삶을 상상도 할 수 없기에, 그 모든 책임을 지고 짓눌려 살고 싶지 않기에, 무엇보다도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에 결혼을 마다한다.

이것이 이 드라마의 특별하고 신선한 점이었다. 생각해 보면 결혼하기 싫은 이유는 결혼하고 싶은 이유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다. 아이를 낳고 싶은 이유만큼이나 아이를 낳기 싫은(혹은 낳을 수 없는) 이유도 다양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드라마만 보면 결혼하지 않는 자에겐 미래도 없는 것 같다. 결혼만이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지름길(이거나 적어도 필수요소)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 결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드라마에서 숱하게 다루었으니, 이 드라마는 왜 결혼하고 싶지 않은지를 좀 더 설득력 있게 드러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왜 모든 남녀가 비슷한 나이에 결혼을 해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고, 자녀 교육 때문에 고민하고, 조그만 아파트라도 장만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일까?

나이 사십의 미혼 남녀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우리나라에서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이 드라마에서 삼십대 후반, 사십대 초반의 리얼한 일상과 고민을 보여 주었더라면 얼마나 신선했을까 말이다.

마흔이 되어가는 이들의 내면적 갈등과 고뇌, 일상을 제대로 담지 못했기에, 이 드라마는 나이대만 이십대에서 서른아홉, 마흔으로 옮겼지, 그저 '까칠한 남자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만나더니 변했다'라는 공식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빤한 드라마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마지막 편의 '캠페인스러움'은 극단에 달했다. 장문정을 만나 난생처음 외로움을 느낀 조재희는 40년의 가치관을 한순간에 버리고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여자로 태어나 아이는 한 번 낳아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장문정은 아이를 원치 않는다는 조재희와 두 말 섞지않고 헤어져 버린다. 어렵게 찾은 '평생의 사랑'이 아이를 낳느냐 마느냐 하는 것으로 역시 한순간에 끝나 버린다.

그리고 조재희는 장문정이 사라진 뒤 그녀의 소중함을 깨닫고(!) 수소문하여 그녀를 찾아간다.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하여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겠다는 거다. 거기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대사.

"왜 아이를 낳고 싶어해요?"
"아이는 우리의 미래잖아요. 아이를 안 낳는 건 이기적인 거죠."

그 대사를 듣는데 헛웃음만 나왔다. 우리 사회의 결혼 강박주의, 출산 강박주의는 언제까지나 지속될까? 88만원 세대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겨운데, 교과부는 친일 반민족행위 청산도 제대로 되지 않은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기는커녕 '좌편향 교과서'를 개정하겠다고 하는데, 온 나라 학생에게 한 날 한시에 똑같은 문제를 풀게 하고는 전국 1등부터 전국 꼴등까지 줄을 세우는데,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에게는 점점 기회가 박탈되는데,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것이 언제까지나 '개인의 이기심'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일까?

결혼과 출산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개개인의 삶과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나 한몸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결혼하고 출산을 해야 한단 말인가? 혹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결혼하고 출산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은 견디지 못하는 '오지랖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정녕 선택의 자유는 먼 나라 이야기이기에 <결못남>은 결국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캠페인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나 보다.

드라마 <사랑해, 울지 마>는 남자 주인공이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여자들끼리 갈등하고 울고 거짓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빌고 원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악감정을 품고는 온갖 모진 말을 아무렇지도 않고 하면 며느리가 커다란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친정 엄마에게까지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을 퍼부었습니다. 도대체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울 정도로 막장스러운 캐릭터입니다.

그걸 보면서 '지금이 어느 땐데'라고 반응하면서도 또다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떠올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 말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드라마에서 한 번 더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각인시킨다는 뜻입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드라마에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알게 모르게 설파해 왔습니다. 위에 언급한 <사랑해, 울지 마> 외에 올해 방송한 것만 해도 <아내의 유혹> <미워도 다시 한 번> 같은 드라마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들은 이성이고 경험이고 지위고 관계 없이 오직 자기가 원하는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거나, 시청자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비상식적인 이유를 들어 상대방을 괴롭힙니다. 신애리나 은혜정, 미수의 시어머니 등은 이토록 찌질할 수 없으면서도 '여자란.. 쯧쯧' 하고 혀를 차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여자의 적이 여자인가요? 도대체 어쩌다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얼마 전 다큐멘터리를 보니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데, 정말 여자는 태어나면서 다른 여자에 대한 질투를 본능적으로 갖게 된 건가요?

결혼도, 사회도 남자가 중심적인 가부장사회에서 여자는 스스로 힘을 갖고 자립하기가 무척 힘겹습니다. 그렇기에 큰소리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내고 살려면 아들, 남편에게 올인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성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속에서 여자는 임금이나 승진 면에서 불리한 것이 사실이고, 그 가운데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연대'와 '화합'이라는 대안은 무시되기 쉽습니다.

이렇듯 여자들이 뭉치기 힘들어지니, 남자는 여자를 좀 더 통제하기 쉬워지고 '여자는 질투심이 강하고 속이 좁으니 화합하지 못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조용히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88만원 세대'에게 '너희가 공부 열심히 안 해서 대기업에 못 들어갔으면서 웬 열등감 폭발?'이라고 묻는 '1등주의자'들과도 같습니다.

무리를 짓고 뒷이야기를 하고 비이성적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여자,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여자의 문제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여자에게는 처음부터 편견의 굴레를 씌워놓고 극히 소수에게만 제대로 된 자리를 허락한 이 가부장제 사회도 원인 제공자입니다.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인지, 드라마에서는 오늘도 '이상한 여자들'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어려운 시어머니, 어려운 여자 상사나 선후배들, 저도 여기저기에서 듣고 경험했습니다. 이들을 드라마에서 그리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상한 여자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점점 자극적으로 그려지면서 '여자의 적은 여자', '여자는 정말 어쩔 수 없어' 따위의 고정관념과 굴레가 지속적으로 덧씌워지는 것은 문제입니다.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여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드라마는 '이상한 여자'가 하는 다양한 극단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그런 여성이 왜 나오는지 사회적인 배경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현재 드라마는 수백 년을 이어 온 '여자는 안 돼'라는 편견을 강화시키는 수단이지만, 통찰력을 갖춘다면 이런 편견을 개선할 수 있는 긍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연기의 달인' 황정민 씨와 간만에 드라마에 출연하여 화제를 모은 김아중 씨가 이끌어 나가는 <그저 바라보다가>는 황정민 씨의 연기와 막장스럽지 않은 소재 덕분에 방영을 시작하자 여기저기에서 호평이 흘러나왔습니다. 비록 톱스타와 평범한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이전에도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차용된 소재지만,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법. 같은 노래라도 어떤 가수가 부르느냐, 누가 편곡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유쾌 상쾌한 시트콤을 써 온 작가들과 황정민/김아중이 만나 어떤 맛을 낼지, 기대하는 마음이 무척 컸습니다.

'갈등의 블랙홀' 구동백은 '재미의 블랙홀'

1, 2회 때에는 요즘 온통 악다구니를 치는 드라마 캐릭터들 속에서 항상 조용조용한 구동백 캐릭터가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황정민 씨의 연기가 캐릭터를 잘 살린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지요. 다만 이렇게 단면적인 캐릭터로는 드라마를 끝까지 이끌어가기 힘들 텐데 하는 우려가 벌써 들기 시작했습니다. 1, 2회까지는 봐 준다고 해도 3회에서도, 4회에서도, 앞으로도 쭈욱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주변사람들의 모든 투정이나 짜증, 모함, 오해 등을 다 받아주면서 무조건 '다 이해해~' 한다면 극이 과연 재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은 (다시 말해 가장 큰 흥밋거리는) 주인공이 겪는 갈등과 고난인데, 구동백은 고난은 겪을지라도 그와 갈등관계로 엮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구동백 앞에만 가져가면 갈등도 갈등이 아니니까요.

3회에서는 그런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동백과 사귀는 것이 가짜임을 들킬 위기에 처하자 일본으로 여행을 가야겠다, 강모 아버지의 강권 때문에 동백과 결혼해야겠다는 엄청난 결정들을 혼자서 내리고 동백에게 '통보'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기자에게 들킨 동백의 책임이라며 지수는 짜증을 제대로 부리지요.

이때도 동백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래도 조용, 저래도 포용할 뿐입니다. 계속해서 동백이 '갈등의 블랙홀' 역할을 한다면 드라마의 모든 갈등들이 힘이 없어질 것입니다. 드라마 초반엔 신선한 흥미를 유발했던 구동백 캐릭터가 드라마의 재미를 잡아먹는 '재미의 블랙홀'이 될 여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도덕 교과서는 재미가 없다

사실 1회부터 '착한' 구동백에 대해 미세한 균열감은 느껴졌습니다. '아니, 갑자기 차 운전석에 앉아 달라는 부탁을 도대체 누가 들어줘? 119에 신고하는 게 정상 아니야? 잘못 앉았다가 법적인 책임이라도 물으면 어떻게 해?' 하고 스스로 되물었지만, 구동백이니까 이해했습니다. 갑자기 누가 절박하게 부탁하면 얼떨결에 그럴 수 있으니까요.

2회를 보면서도 '남한테 거짓말 한번 안 하고 살았다는 사람이 온 국민을 속이는 거짓 약혼을 저렇게 쉽게 한단 말이야? 그러고도 뭔가 괴로워하거나 갈등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네?'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지금 당장 나한테 강동원이 계약약혼 하자고 하면 어떻게 거절하겠어?'라고 스스로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동백이 지수를 도와준 대가로 돈이나 비싼 차 대신 친필 사인이나 직장 체육대회 참석을 부탁하는 에피소드 류의 것들이 매회마다 반복되면서 극을 지루하고 뻔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극이 언제까지나 '톱스타 한지수는 이러저러해서 구동백에게 짜증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구동백의 행동을 보고 한지수도 마음을 다시 착하게 돌이켰습니다'로 전개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안 그래도 이 드라마는 무척 빤한 전개가 예상되는 드라마입니다. 계약 결혼을 하면서 여자는 남자의 따뜻한 면, 의외의 매력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빠지게 되지만, 위기가 있을 테고 결국은 서로 사랑을 확인한다, 이런 그림이 대충 그려집니다.

그런데도 시청자의 눈을 끌려면 과정이 상큼하고 통통 튀는 에피소드로 채워져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한지수가 엇나가고 구동백이 (시청자에게는 예상 가능하지만 한지수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착한 행동을 보고 감격하고... 언제까지 이런 패턴만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도덕 교과서도 황정민이 읽어 주니 재미있긴 합니다만, 아무리 황정민이라도 언제까지나 도덕 교과서가 재미있게 다가오진 않을 것입니다.

'그 바보'에는 바보들만 나온다?


모든 톱스타가 <온에어>의 '오승아' 같지는 않겠지만 한지수는 포스가 심하게 부족합니다. 톱스타라고 물론 사랑을 모르겠습니까? 연예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행동하는 데에 제약도 많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이건 뭐, 지나칠 정도로 수동적입니다. 연인인 강모의 아버지를 대할 때에도 한 사람의 성숙한 사회인으로서 대화하는 게 아니라, 무슨 60년대 <미워도 다시 한 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강모의 아버지 김 의원뿐만 아니라 매니저, 강모의 말까지 순종하려니, 지수는 남의 뜻대로 움직이는 존재일 뿐 자기만의 생각과 의지는 도대체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극에서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은 지수의 동생과 동백의 동생, 김 의원밖에 없는 듯)

강모 또한 아버지의 무리한 요구를 받더라도 "아버지!" 하고 한번 애절하게 소리 지른 다음에 수동적으로 그 요구에 이리저리 휘둘립니다. 구동백이야 워낙 지수와 매니저가 하자는 대로 하는 중이고요(지수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선사하는 '착한 행동'을 빼고는).

비상식적이고 자극적인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이런 '착하고 따뜻한' 드라마의 등장은 무척 고무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흥미 포인트가 구동백의 순박함에만 맞춰서는 끝까지 흥미롭기 힘들 것입니다. 굳이 한지수를 톱스타라는 설정으로 했다면 톱스타에 걸맞은 캐릭터와 라이프스타일을 보여 줌으로써 구동백과 대비도 시키고, 아울러 시청자에게 눈요깃거리도 제공해야 합니다. 황정민 씨의 연기야 정말 멋지지만, 구동백의 순수함과 엉뚱함이 한 축, 한지수의 톱스타스러운 포스가 한 축을 이루어 나란히 걸어가야 드라마가 제대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지금처럼 한지수라는 축이 삐걱거린다면 구동백의 순수함이 주는 재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 이야기>는 제목대로 남자들이 극의 큰 흐름을 이끌어 가는 와중에 두 여자(서경아, 채은수)도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며 드림팀의 1차 복수극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주인공 김신은 자기 형을 죽인 사람을 향해, 드림팀 멤버 재명과 문호는 자기 아버지와 친구를 죽인 사람을 향해(경태는 삼촌 따라 강남 온 격이지만) 복수의 칼날을 겨누었는데, 알고 보니 복수의 대상은 채동건설 회장이 아니라 진짜 살인자 채도우라는 것까지 8부에서 밝혀졌습니다. 복수의 대상이 극 중반으로 오면서 명확해진 셈입니다.

그리하여 8부의 마지막 신에서는 신과 도우가 마주보며 앞으로 펼칠 대결을 예고했습니다. 이제 본론의 서막(?)이 끝나고 본론의 진짜 본론이 다음주부터는 시작되겠군요. 이 마당에도 <남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남자들 중 주인공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이 제일 마음에 걸립니다.


김신? 누구~! (왕비호 버전)

지금껏 우리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형이 죽었다는 사실, 그것에 격분해서 방송국에 석궁 테러 하려다가 전과자가 되었고 그곳에서 '형님'을 만나 드림팀에 합류했다는 정도입니다. 알고 보면 꽤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어 온 셈인데 어찌 된 것인지 이것은 그저 '줄거리'로 다가올 뿐 이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 하나하나에서 김신의 캐릭터나 존재감이 더 부각되지 못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형의 죽음과 감옥 안에서의 생활, 드림팀의 모습 등에서 악의 화신 채도우, 자폐형 천재 안경태, 위장술과 화술의 달인 박문호, 확실한 브레인 도재명 등 나머지 '남자'들은 자기만의 캐릭터와 매력을 8부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펼쳤는데 정작 주인공 김신만은 자기만의 강인한 인상을 심어 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도재명은 뛰어난 외국어 능력과 여성을 사로잡는 매력, 변호사 자격증, 중국인 양아버지 덕분에 얻은 인맥까지, 이 '드림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안경태의 삼촌인 박문호도 전직 사기꾼답게 뛰어난 변장술과 능수능란한 화술, 트릭과 인맥, 드림팀 내 인물을 하나로 모으는 친화력까지, 그 역시 없어서는 안 됩니다. 안경태 또한 주식으로 사기 치려는 이 드림팀에서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지요. 비단 드림팀을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이 세 명의 캐릭터는 드라마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며 고유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이겁니다.

메인 주인공보다 더 매력적인 악역, 채도우


채도우의 매력은 또 어떻습니까? 이런 악역, 참 신선합니다. 얼마 전 종영한 <카인과 아벨>에서 그랬듯이 악역은 대부분 구구절절한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했고 세상이 미웠고.. 이런 이유로 난 네가 미워! 하는 식이지요. (전부 그렇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서 시청자에게 자신이 악하게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어필하고 이해받으려고 애씁니다. 또한 '나쁜 남자'의 심장이 아무리 얼음같이 차가울지라도 실상은 '사랑 앞에서는 약해지기'라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채도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악해진 이유 따위는 애초에 보여 주지도 않고 이해시킬 필요도 없는 듯 행동합니다. 시청자에게조차 자신을 어필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름부터 '섀도우' 즉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악의 화신일 뿐입니다. 요즘 한창 인기 많은 '훈남'과는 정 반대 지점에 서 있습니다.

보통 드라마에서 악역은 주인공보다 덜 사랑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김신보다 채도우가 더 주목받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 와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4대1로(아니, 채은수가 김신 쪽으로 갔으니 5대1이라고 해야 하나요?) 붙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모습도 매력적이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는데도 조용히 눈빛 하나로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도 지존급입니다. 매너 있고 실력 있고 '감정 있는 척'도 잘하고 여심을 자극할 줄도 알고 게다가 감수성 넘치는 모습으로 피아노 연주까지 하는데.. 이거야 뭐, 주인공이 채도우 같아요. 김강우 씨의 차가우면서도 절제된 연기 또한 놀라울 정도입니다. <식객>에서는 무난한 정도였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성장해 있었네요.

채도우만 강할 뿐, 김신도 복수 1차전도 너무 약해~!


김신을 제외한 드림팀 멤버도, 채도우도 캐릭터와 매력 포인트가 명확한데 김신만 제자리를 못 찾고 있습니다. 나머지 '남자'들의 매력이 워낙 눈에 잘 띄기에 더더욱 김신의 캐릭터가 '듣보잡'처럼 느껴집니다. 변장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달변가도 아니고 카리스마도 없고 지휘력도 안 보이고 말입니다. 최소한 김신이 드림팀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다들 자기 역할을 할 때 김신은 도대체 무슨 역할을 했던지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드림팀의 대표는커녕, 일원으로서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니 말이지요.

결정적으로 꼭 복수를 하겠다는 전투력도 약합니다. 자기 형이 죽어서 복수하겠다고 석궁 테러까지 했으면서도, 정작 감옥에서 복역한 뒤로는 옛 애인에게 찾아가 '너만 내게 돌아온다면 복수 따윈 그만 둘게'라고 하는데 그저 웃음만 나더군요. 가뜩이나 복수심 없어 보이는 주인공인데, 저런 설정까지 나와 버리면 정말 주인공의 복수심을 더 의심하게 되지 않겠어요.

채동건설이라는 대기업의 회장이 저렇게 쉽고 허술하게 50억이라는 큰 돈을 사기 당하는 것도 그리 설득력이 있진 않았지만.. 앞으로 펼쳐질 복수극 2차전은 좀 달라지리라 기대해 봅니다. 달라지지 않으면 이 드라마는 실패가 될 수밖에 없고요. 8회 마지막에서는 구부러진 계단에서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위에, 한 사람은 아래에 서 있지만 앞으로 이들의 위치가 어떻게 될지는 예상이 가능하지요.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인 김신의 매력을 살리는 것입니다. 드라마의 중반에 오기까지 도대체 김신만의 매력이 뭔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건 정말 큰 문제거든요. '본론의 본론'으로 들어가면서는 복수 과정도, 주인공의 캐릭터도 '본론스럽게' 펼쳐지길 기대합니다.


<MBC 스페셜> 김명민 씨 편을 보고 심드렁하긴 참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그가 너무 열심히 하고, 또 열심히 한 만큼 잘하는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에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김명민은 지금처럼 열심히 했으리라 믿지만, 오랜 세월을 거쳐 먼길을 돌아왔기에 그가 현재 누리는 인기와 영광이 더욱 빛이 납니다. 어제의 방송을 보면서 저는 김명민 씨에게 감동받는 동시에 또 한 명의 배우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박용우 씨였습니다.

비슷한 나이, 비슷한 이력


1972년생 김명민 씨는 1996년 SBS 공채로 연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경쟁을 뚫고 공채로 선발되었다는 것이 곧 마음껏 연기를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방송국에 나가서 피디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허리를 숙이며 배역을 부탁했습니다. 그리하여 몇몇 드라마에 단역 및 조연으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1971년생 박용우 씨는 1995년 MBC 공채로 연기생활을 시작했습니다(공채 이전에 시트콤에 출연한 경력이 있긴 합니다). MBC 공채 24기로 선발되었는데 두 번은 낙방하고 세 번째에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 뒤로 잘 풀릴 것 같았다고 합니다. 얼마 후 한 피디의 눈에 띄어 주말연속극 <아파트>에 최진실 씨의 상대역으로 발탁되었거든요. 신인으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로, 여기저기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진실, 채시라, 김지호, 김민종 씨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 사이에서 박용우 씨는 너무 얼어붙은 나머지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두어 달이 흐른 뒤 피디에게 불려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보니까... 너는 이걸로 밥 먹고살기는 힘들 것 같다. 다른 직업 알아봐라." 속으로는 엄청나게 상처받았어도 겉으로는 애써 씩씩하게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알고 보니 그 말은 드라마에서 빠지게 된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김명민 씨는 '주연급 얼굴은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단역 생활을 몇 년간 지속했습니다. 박용우 씨는 데뷔하자마자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지만 '연기로 먹고살기는 힘들겠다'라는 말을 들으며 드라마에서 '잘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다

그래도 두 배우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김명민 씨는 방송국에 3년간 매일 나가서 똑같은 레퍼토리로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죠. 연기자 김명민이라고요. 어제 보았던 피디에게 오늘도 나가서 인사하고, 3개월 전 개편 때 새 드라마를 시작하면서 나를 기용하지 않았던 피디에게 오늘도 나가서 다음 드라마에는 꼭 저를 한번 써 봐 달라고 인사를 한다는 것,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박용우 씨는 공채 동기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으며 주말연속극에 캐스팅되었기에, 드라마에서 하차할 때에도 가장 '망신'스러웠을 것입니다. 여성 연기자만 돋보인 영화 <올가미>에서도 그는 호평을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배우들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비중'입니다. 한번 주연급(주조연급)으로 올라갔던 배우가 조연, 심지어 단역으로 내려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박용우 씨는 '행인1'로 돌아갔습니다. 최진실의 상대역에서 '행인'이 된 그, 그럼에도 시련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명민 씨는 단막극에 주연으로 처음 캐스팅되었다가 엎어진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긴 호흡의 극도 아니고 단막극일 뿐이지만 주연으로 데뷔할 기회가 온다는 게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배우에게는 연락도 없이 주연 제의를 취소하다니, 그의 눈에서 말할 수 없는 서러움이 읽혔습니다.

박용우 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행인과 포졸 등의 단역으로 출연하며 꾸준히 연기 수업을 받던 그에게 미니시리즈의 조연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스포츠가 소재인 드라마라서 박용우 씨는 이전에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그 운동을 두 달 동안이나 연습했습니다. 마침내 첫 대본 연습 날,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중에 연기자 선배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용우도 출연하는구나. 그래, 무슨 역이야?" 알고 보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역할이 그 선배에게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자비를 들여 어려운 스포츠를 배운 것도, 두 달 동안의 노력도 아무 소용 없이, 민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방송국을 나서는데 그날따라 비까지 내렸다고 하더군요.

김명민과 박용우, <스턴트맨>에서 만나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난 것이 바로 영화 <스턴트맨>이었습니다. 만년 단역, 조연 생활을 계속해온 김명민 씨, 아무리 노력해도 연기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곱상한 외모 때문에 부잣집 아들이라는 비슷비슷한 패턴만 반복해온 박용우 씨. 둘이 주연이 되어 거친 액션에 코믹한 요소까지 가미한 영화를 찍었지만 80% 넘게 진행되었을 때 촬영이 중단되었습니다.

박용우 씨는 "말랑한 역만 하다 끝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을 때 만난 형사 역할"에 모든 것을 거느라 2년간 다른 작품을 고사하고 매달렸다고 합니다. 김명민 씨는 "내가 더 매력 있는 배우, 인지도 있는 배우였다면 이렇게 촬영이 중단되지는 않았겠지" 하는 자괴감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이쯤에서 두 배우는 '해도 해도 안 되는 현실'에 진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극으로 일어서다


그때 김명민, 박용우, 두 배우의 나이는 서른하나, 둘이었습니다. 배우로서 한창 꽃 같을 나이에 그렇게 일어서다 또 좌절하고 일어서다 또 좌절하면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안받은 역할이 김명민 씨는 '이순신'이었습니다. 엎드려 기다린 자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지요. 그는 주위의 모든 우려를 불식시킨 것은 물론, 그해 연기대상을 수상합니다.

박용우 씨는 <무인시대>에서 '경대승' 역할로 이미지 쇄신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유약하고 곱게 자란 이미지의 역할만 주로 맡던 그에게 경대승 역할이 맡겨진 것은 의외였습니다. 게시판에서는 '의외의 캐스팅이다'라는 말부터 '드라마가 산으로 간다'는 비난까지 난무하는 상황이었지만, 그해 연말 결국 박용우 씨는 처음으로 연기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박용우의 연기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영화 <혈의 누>를 보고 어느 기자는 이렇게 기사를 썼더군요. "<혈의 누>에는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이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박용우라는 사실이다." 그만큼 박용우의 연기가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름만으로도 신뢰감을 주는 배우


이후 김명민 씨는 <하얀 거탑>의 장준혁,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를 거치며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연기자로 올라섰습니다. 박용우 씨도 <달콤 살벌한 연인> <핸드폰> 등에서 보인 연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얻었습니다. 둘 중 누가 더 뛰어난 연기자인가 하는 비교는 무의미합니다. 두 사람 다 지금도 입에 연필을 물고 발음연습을 하는 그 열정과 겸손함, 몇 년을 단역생활만 하면서도 언젠가는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 주겠다는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집념이 오늘의 그들을 만들었겠지요.

'배우'란 어떤 직업일까요? 얼굴 잘생기고 몸매가 멋진 것이 배우의 1차 조건일까요? 김명민, 박용우 씨 두 분 다 잘생긴 얼굴들이지만 얼굴로 승부하는 배우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름만으로도 연기에 신뢰감을 주는 몇 안 되는 배우입니다. 막장 드라마 논란과 한국 영화의 위기론이 끊이지 않는 요즘, 이런 배우가 있어서 우리나라 드라마와 영화에도 여전히 미래가 보입니다.